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카무라 사건 (문단 편집) === 장쉐량의 대응 === 8월 19일 장쉐량의 일본인 군사고문이 일본인과 군부의 분노가 심하여 사태의 악화가 우려된다는 경고를 전했다. 장쉐량은 "이같은 감정의 오해로 인해 사건이 빈발한 것은 진실로 유감이다. 이에 대해 충분히 단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나 자신도 아직 하등의 보고를 받지 못하였으나 어떠한 보고에 대해서도 조사해야 한다."라고 회답했다. 장쉐량은 이 사건이 일본의 만몽 정책에 끼칠 영향을 우려하여 8월 24일 일본인 고문들에게 "동북에 있어 일중 양국의 현상에 비추어 이 시기에 속히 미해결된 여러 현안을 해결할 급무를 통감함으로써 아래에 기록된 10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동북외교위원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현재 일본측이 동북에 대한 교섭 책임자를 어려워하고 있는 현상을 고쳐 장래 모든 교섭은 해당 기관으로 하여금 신중히 심의하여 일본과의 교섭에 응해야된다고 생각한다."라고 전했고 시데하라 외무상이 요구하는 교섭에 응했다. 하지만 9월에 이르러 군부의 태도, 여론, 시국이 나날이 악화됨으로 장쉐량은 일본과의 관계를 완화하기 위해 탕이화를 일본에 파견하여 시데하라 외상을 방문하게 했으며 고의로 연기할 의사가 없다고 설명했으나 시데하라는 장쉐량의 태도가 '지극히 짜임새' 있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결과적으로 합의가 연기되었으며 결과가 불만스러운 점에 대해 일본의 여론이 커다란 자극을 받게 될 것을 신중히 고려하여야 한다고 회답했다. 탕이화는 [[미나미 지로]] 육군상과도 회담한 후 귀국하여 9월 8일 하야시 총영사와도 회담하여 쌍방이 함께 양보적인 정신 아래 평화적으로 해결할 뜻을 표명했다. 장쉐량은 9월 9일 고문을 일본에 파견해 미나미 지로 육군상과 가나야 한조 육군참모총장과 의향을 전하게 했다. 또한 여러 심복들에게 만약의 경우에 절대 부저항주의를 채택할 것을 지시하는 훈령을 내렸다. 한편 동북 외교연구위원회는 9월 6일 법관과 헌병사령 등을 파견하여 2차 조사에 착수,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내놓았다. ||6월 26일 소악공부에 도착한 나카무라 일행은 흥안 둔간대 제3단의 연병장 부근을 지나갔다. 거동이 수상하므로 제3단 연단 왕병의가 여권을 조사한 바, 중국의 통행 허가증을 소지하지도 않았고 해명도 횡설수설이었다. 그래서 단부로 연행하여 심문하니 그들은 유력 도중 비적에게 쫓기어 여기까지 도망해왔다고 한다. 단부는 일본이 다시 피해를 당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그곳에 머물게 한 후 지시를 기다려 출경까지 보호하기로 했다. 군대의 식사는 허술하기 때문에 읍의 식당에서 네차례 식사를 하러 가서 장교가 배식했다. 27일 오후까지는 완전히 귀빈 대접이었다. 단장인 조관오는 심양에 가고 부재 중이었는데 그날 밤 단장 대리 관옥형이 출장지에서 귀단, 비로소 간첩 혐의를 씌워 나카무라 등의 신체검사를 명령했다. 그랬더니 바지 속에서 일본어와 러시아어로 된 군용지도 2매와 일기 2권 그리고 필기록 3매, 은표 190원과 금표 2원이 발견되었다. 일기에는 장차 군사상에 응용하기 위한 사항이 가득 기입되어 있었다. 그들이 군사탐정인 것은 틀림없었다. 둔간 공서의 지시로 정중하게 다루면서도 감시를 강화했다. 그러나 나카무라 등은 그날 밤 파수병이 잠들어버린 틈에 단부 뒷문으로 도주했다 파수병들이 즉시 알아채고 뒤를 쫓았다. 얼마가 지나 북쪽 산에서 한바탕 총소리가 들리더니 잠잠해졌다. 파수병들이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사무장인 곽덕창이 병사를 이끌고 수색하러 갔다. 그들은 일본인의 시체를 달빛 아래에서 발견했다. 파수병들도 외국인을 사살한 일로 죄를 문책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그대로 도망해버렸던 것이다. 관장 대리 관옥형도 역시 이 사건이 국제문제가 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부하들에게 증거인멸을 명령, 시체 및 소지품 그리고 화물 운반용 말을 소각시켰다. 지도, 일기, 필기록은 보존했다. 더욱이 상관에게는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고 사병들에게는 사건을 입 밖에 내지 않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조사 결과는 병사들의 함구 때문에 요령성 주석 장식의가 실시한 1차 조사에는 드러나지 못하고 2차 조사에서야 드러났다. 이 때문에 중국 측은 그전까진 비적의 소행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장쉐량은 시데하라 외상의 주장대로 외교교섭에 초점을 맞추어 외교교섭에 대한 자신의 기대를 일본측에 전달했고 베이핑의 여론도 외교교섭에 희망을 걸었다. 지나치게 외교에 치중하여 부저항주의로 나갔던 장쉐량의 태도에 만주는 불과 며칠 후 [[만주사변]]에서 1만 5천에 불과한 관동군에게 극도로 쉽게 함락당하는 치욕을 겪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